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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속 이야기

천자봉이야기

by 하늘냄새2 2007. 8. 6.
천자봉에 얽힌 전설 뒤로
집이 가난한 주씨 가문에 총각 보재기(잠수부)가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삼년상을 지내느라고 아버지 시신을 신봉(3년간 땅에 묻지 않음) 해 놓고 매일 바다에서 해산물을 따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 그때 중국의 한 지리박사가 자기 아버지가 죽자 머리만 잘라서 짊어지고 명당자리를 찾아온 것이 웅천이었다.
산세를 둘러보니 이곳이 틀림없이 천자를 탄생시킬만한 명당인데 바닷속이어서 자기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어 궁리하던 중 마침 총각 잠수부를 만나 이야기하려고 가까이 갔더니 잠수부 역시 부모상을 당한 표시를 하고 있어서 잘 되었다고 생각한 지리박사는 잠수부를 보고 이 바닷속 밑에 들어가면 미륵(부처님)이 있을 것이니 당신 아버지 머리는 왼쪽에 걸고 내 아버지 머리는 오른쪽에 걸어두면 당신이나 내가 크게 될 것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주씨는 쾌히 승낙하고 자기 아버지 머리는 왼손에 지리박사 아버지 머리는 오른손에 들고 물속에 들어갔더니 과연 미륵이 있었다.
막상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미륵이 눈을 크게 뜨고 인상이 하도 험악하여 앞에서는 도저히 걸지 못하고 뒤로 돌아 부처의 뒤에서 걸고 나왔다. 기다리던 지리박사가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더니 "미륵이 너무 무서워 뒤에서 걸었다"고 솔직히 말했더니 무릎을 치면서 그것도 당신의 복이라면서 당신은 웅천에 있지말고 멀리 떠나라고 하면서 서로 헤어졌다.

주씨는 그길로 멀리 떠나가 중국의 서울 근처에 도착했는데 산위에서 이리저리 헤매다가 큰 능을 발견하고 그 능의 비석 뒤에서 쉰다는 것이 잠이 들어서 밤이 깊어서야 깨어났다. 그때 능 앞에 예쁜 처녀가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처녀의 기도를 엿들으니 "아버지, 지금 오빠는 반란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꼭 오빠가 승리해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천자가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결국 주씨는 이 처녀와 인연을 맺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처녀는 당시 중국 왕실의 공주였다. 하루아침에 부귀 영화를 누리게 된 주씨는 어느날 궁궐 이곳 저곳을 구경하다가 한 곳에 머무르니 용안과 옥이 있었다. 호기심에 용상에 앉아 왕관을 쓰고 옥새를 목에 걸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왕자가 승리하여 이제는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대관식을 하려고 여러 사람이 모여 있었다. 주씨는 겁이 나서 꼼짝 못하고 그 자리에서 떨고만 있었다. 그 때 문을 열고 들어선 왕자는 매우 놀랐지만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닌 하늘에서 내려주신 천자라 생각하고 무릎을 꿇어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맹세하고 천자로 모시게 되었다. 왕자는 대신이 되어 여러 대신들과 회의를 열어 정승을 임명했는데 추대된 정승이 다름아닌 웅천에서 만난 지리박사였다고 하며, 자기 아버지 머리를 왼쪽에 걸었기 때문에 정승을 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선사시대부터 자연촌락을 이루어 석기와 청동기 그리고 철기시대로 발전하는 문화의 빛을 점화하였던 우리고장 진해는 가야 연맹체의 세력권 내에서 해상 교역을 통해 성장ㆍ발전 하였다.
가야 연맹이 신라에 편입된 이후 웅지현이었던 지금의 웅천이 통일신라 시대에 웅신현으로 개칭되면서 의안군에 속했고 지금 시의 중심지에 위치했던 완포향은 합포현에 속해 있었다.

고려시대 후대에 이르러 완포향이 현으로 승격하여 합포현에서 분리 독립하였고 조선 문종 때에는 완포현과 웅신현이 웅천현으로 통합되고 갑오개혁 후에는 웅천군으로 개칭되었다가 1908년에는 창원부로 통합되었다.
그후 1912년 이 지역에 처음으로 진해라는 이름을 붙인 진해면으로 개편되었으며, 1931년에 창원군 진해읍으로, 1955년 9월 1일에 진해시(鎭海市)로 승격, 오늘에 이르면서 1973년 웅천이, 1983년에는 웅동이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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